등록된 날짜 2018년 12월 14일 (금)

기사

뻐지(Ffudge) - 내일은 내일 안 오고


내일은 내일 안 오고 오늘도 어제가 되질 않아
할 일은 쌓여가고 생각이 쌓여가고 어둠이 쌓여서
끝내는 잠이 오기 시작하고

마법의 베개에 머리를 살짝 대고
잠깐 생각 좀 해보려 했는데 해가 날 비추네
어제를 감추네 오늘을 오늘을 오늘을 남겨놓고
어제를 또 감춰버렸어

꾹꾹 누른다 슬픔을 눌러 본다
꾹꾹 누른다 권태를 눌러 본다
꾹꾹 누른다 허무를 눌러 본다
꾹꾹 누른다 어제를 눌러 본다

누군간 힘을 내라고 어설픈 경험에 날 끼워 맞추려
누군간 정신 차리라고 어설픈 자기 경험에 날 끼워 맞춰 가타부타
한 숨이 됐고 무거운 짐이 됐고
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네
한 숨이 됐고 무거운 짐이 됐고
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네

꾹꾹 누른다 슬픔을 눌러 본다
꾹꾹 누른다 권태를 눌러 본다
꾹꾹 누른다 허무를 눌러 본다
꾹꾹 누른다 어제를 눌러 본다

하루가 다 똑같아 어제를 오늘 또 살고
하루가 다 똑같아 오늘을 내일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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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쌀쌀해지면 옷장 속에서 가디건을 찾아서 꺼내 입듯, 누구에게나 찬바람이 불면 문득 생각나는 노래들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뻐지(Ffudge)'의 <내일은 내일 안 오고>(2013)라는 노래가 그렇다.

어쿠스틱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이지 리스닝 팝이 대세였던 2013년. 출처 TV 리포트 소성렬 기자

2012년 하반기에 진행된 ‘K팝 스타 시즌 2’에 처음 등장해 2013년까지도 쭉 인기를 이끌어 갔던 악동 뮤지션. 이 시기에 이름을 알리고 2014년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내일은 내일 안 오고>가 발매되었던 2013년은 로이킴, 긱스, 악동 뮤지션 같은 어쿠스틱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이지 리스닝 팝이 유행한 해였다. 그런 맥락 속에서 바라본다면 <내일은 내일 안 오고> 역시 당시의 시류를 타고 발매된 유행가의 연장선상에 위치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친근한 곡조와 귀에 감기는 뻐지의 목소리에는, 듣는 사람 귀에 천천히 스며들다 약 사 분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듣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듣기 편한 멜로디와는 달리, 가사 내용은 그렇게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내일은 내일 안 오고>가 수록된 뻐지의 첫 번째 EP 앨범, ‘뻐지’

 

나른한 하모니카 소리 뒤에 시작하는 뻐지의 날카롭고 달짝지근한 목소리는, 이 곡의 타이틀이기도 한 “내일은 내일 안 오고…”하는 소절로 첫 운을 뗀다. ‘내일은 내일 안 오고, 어제도 오늘이 되지 않는다’는, 마치 수수께끼 같은 말들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무력하게 매몰되어 가는 일상이다.  

그러나 허무하고 권태로운 일상에 대한 노래인 것 치고는, 가사에서는 생활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유일하게 구체적인 소재가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1절의 ‘베개’이다. 화자는 종일 ‘쌓여가는 할 일과 생각’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자기 방 베개에 머리를 뉘고 잠을 청해 본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풀리지 않는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창문 밖에서는 어느덧 햇빛이 새어들고 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고, 또 하루가 의미 없이 지나가고 말았다. ‘어제가 오늘이 되지 않고’, ‘내일도 오늘이 되지 않는다’는 가사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허무와 권태만이 쌓여가는 일상을, 뻐지는 ‘베개’라는 아주 단순하고 주변적인 소재에서부터 시작해 설득력 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침대 베개 위에서 홀로 외롭게 고민하는 화자의 좁은 세계 속에 처음으로 ‘타인’, 혹은 ‘외부 세상’의 존재가 개입하는 것은 2절부터다. (누군간 힘을 내라고/어설픈 경험에 날 끼워 맞추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존재도 위로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화자 주위의 ‘누군가’들은, ‘자기 경험 속에 나를 끼워맞추며’ 헛소리나 해대기에 바쁠 뿐이다. 내내 큰 테마 변화 없이 흘러가던 곡은, 가사 속 타인의 등장과 함께 처음으로 다소 가파른 구성을 보인다. 이는 노래 속에서 시종일관 무력하던 화자가 유일하게 격한 반응을 나타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켜켜이 쌓이며 뻐지의 노랫소리와 겹쳐지는 코러스는 마치 화자를 멋대로 판단하고 깎아내리는 타인들과 외부 세계의 잡음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바깥과 충돌하며 무수한 층으로 분열되는 화자의 자아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복잡하게 확장되는 사운드와 함께 나아가던 노랫소리는, 결국 후크의 첫 소절인 “꾹꾹 누른다”로 귀결되고 만다. ‘쌓여가는 할 일’처럼, 다른 모든 부당한 일들처럼, 어쩔 수 없이 눌러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든 풀리지 않는 고민과 현실에 밤새 고민하다 무력한 심정으로 커튼 사이로 비쳐 오는 아침 햇살을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산 사람들 앞에서 속만 태우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뻐지의 가사는 단순히 가수 본인의 찌질한 독백이나 패배자의 한탄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에 더불어 좀 더 설득력을 불어넣는 것은 노래의 편곡과 뻐지의 표현력 덕분이다.


노래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는 기타의 단조로운 리듬 반복은 마치 최면을 걸듯 청자가 천천히 노래 속에 젖어들게 만들며, 교묘하게 귀를 착 감아 오는 뻐지의 음색은, 단순히 유사한 경험을 통한 공감이나 공유가 아닌, 마치 청자와 노래가 하나로 포개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렇듯 가수 본인의 일상적 경험에서부터 시작해 청자의 삶 속까지 파고드는 감각의 확장을, 뻐지는 오직 단순한 편곡과 호소력 짙은 음색이라는 단촐한 구성만으로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전 뻐지는 자신의 인터뷰에서 ‘소소한 주제로 개개인의 작은 일상에까지 구석구석 스며들어 유지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베개’라는 아주 작고 평범한 소재에서부터 시작해, 청자의 권태로운 일상까지 파고들어 되돌아보게 만드는 뻐지의 뛰어난 ‘전이’ 능력은 단순한 대중 가요나 유행가를 넘어, 어느 새 나의 삶 한 구석에 자리잡아 있을 것만 같은 친근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시작되어 침대의 베개나 이불을 두꺼운 것으로 바꾸려 할 때, 문득 뻐지의 목소리가 생각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뻐지는 현재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는 ‘내일이 내일이 되지 않을’ 무력한 순간은 언제나 찾아들 것이다. 그런 때에, 이름 뜻처럼 끈적한 초콜릿 같기도 하고, 갓 끓여낸 구수한 보리차 같기도 한 뻐지의 음색을 들으며 내 인생 속 가을과 겨울을 대비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글쓴이: 박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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